은혜 나눔 게시판

기도회 기간 동안 받은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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Live SeaSon 5. 기도회를 돌아보며

김현준
2020-12-10
조회수 400

안녕하십니까? 저는 서른 일곱살 된 김 현 준 청년 이라고 합니다. 사연을 올릴까 말까 하다가 용기 내서 사연을 올려봅니다.

 Light House 1~5차 기도회를 전부 드리며 "용서하라"고 하셨던 차 선교사님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.


저는 학창시절 (초등학교 2학년 때~고등학교 3학년 때 까지)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살았습니다. 

그래서인지  늘 혼자였고 친구는 한 명도 없이 살았습니다. 


아침에 학교 가는 것이 두려웠고 학교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. 

초등학교 2 학년 때는 3학년 가면 괜찮겠지.. 3학년 때는 4학년 가면 괜찮겠지..했던 학교 폭력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. 


초등학교 때는 지금과 같은 학교 심리 상담사 선생님이 배치되 있지 않았었고 중학교에 입학하고나서 2년 후인 

중학교 2학년 때 배치가 되셨습니다.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담임 선생님들과 부담임 선생님들께도 도움도 청해봤지만 

선생님이 개입하면 너만 힘들게 된다며 선생님들도 제자인 저를 늘 외면만 하셨습니다.


그렇게 초등학교 2학년에서 6학년 4년 이란 긴 시간을 학교 폭력을 당하며  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갔을 때 

이 지긋지긋한 이유없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니 했는데 그도 제 생각 뿐이었습니다.


중학교 1, 2학년 때도 심하긴 했지만 3학년 때 최 고조에 달했습니다. 


교과서가 없어져 찾아보면 청소 도구함 속에 있거나  3학년 때 교실이 1층이었기에 학교 화단에 버려져 있거나 

교과서는 책상 서랍 속에 있는데 가방이 없어져 찾아보면 가방 속에 화단의 흙과 죽은 쥐, 혹은 살아있는 지네 를 넣어놓는 경우도 있고 

가을철에는 마이를 입는데 마이에 가래침을 뱉어 놓거나 하는 경우도 생겼고 얼굴에 검은 비닐 봉지를 씌우고 한 아이가 주도해서 

저를 보호해 준 한 명 아이만 빼놓고 반 전체 모두가 합세해 이유 없는 폭행을 하기도 했었습니다. 


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3분 거리가 집 이었기에 부모님께 차마 그런 처참한 모습들을 보여드릴 수 없어 학교 폭력의 흔적을 

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수돗가나 화장실 수돗가에서 지우고 집에 가는 것이 일수였습니다. 


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갔지만 고등학교 때는 그나마 죽은 쥐, 지네 같은 것은 볼 수 없었지만 

키가 작고 못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들만 바껴 집단 구타는 계속되었고 따돌림도 계속되었습니다. 


늘 점심시간엔 혼자서 운동장구령대  옆 계단에 피신해 밥을 먹고 들어와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. 

그리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들도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.


그렇게 초등학교 2학년 ~고등학교 3학년 까지 총 11년의 힘든 시간을 겪고 나서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 

그 이유없고 지긋지긋한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.


그리고 저는 현재 우울증 이라는 말 하지 않으면 겉으론 보이지 않는 생을 "자살"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마감한다는

병을 앓게 되었고 지금도 약을 타 먹으며 하루 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. 그 사이 너무너무나 제 생이 불쌍하고 억울해서

자살 시도 도 세 번이나 시도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기도 했었습니다. 죽으려구요!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자살 시도를 

세 번이나 했지만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니었는지 하나님께서는 세 번 다 저를 살려놓으셨고 저는 그 때 마다 교회에 나가

절규 해야 했습니다. 


" 내 목숨 내 껀데 왜 마음대로 못하게 하느냐고 이렇게 구차하게 힘들게 살 바에야 죽겠다는데 왜 그 것 조차 마음대로 못 하게 하느냐고!

 하나님 나 고통당할 때 보고만 계시고 도와주시지도, 막아주시지도 않으셨지 않느냐고! 나만 없어지면 모두 행복해 질 수 있는데 왜 내 고통엔 관심이 없으시면서 이러고도 살라고 하시느냐고!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내가 하나님 자식이면 나한테 이렇게 하시면 안 돼는 거라고"

악을 쓰며 울어야 하는 날도 부지기수 였습니다. 예배가 예배가 아닌 날이 많았습니다. 그저 울다 오는 것 뿐 이었습니다.


그리고 고등학교 때 저를 괴롭히던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 한 아이가 저랑 같은 서른 일곱의 나이에 심근경색 으로

세상을 뜨는 일이 있었습니다. 저한테 용서를 빌지도 못하고 말입니다. 차마 그 아이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장례식에는

갈 생각이 아니었으나 차 목사님의 "용서해줘라"라는 말씀이 떠올랐고 그 아이가 제게 얼마나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을까? 

라는 마음이 들었고 용서 받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할 먼~~~~길을 떠날 마음을 생각하니 결국 마음에도 없는 장례식에 가게 되었습니다. 


그 먼저 떠난 아이의 부고를 알려온건 고등학교 때 저를 꾀나 괴롭히던 다른 친구였고 지금의 바뀐 이름과 바뀐 제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든지 

"~~가 심근 경색으로 떠났어. 지금 여기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이야 힘들지만 와서 보고 용서 해 주고 가! 이제 이승에서 다시는 볼수 없는 사람이고 얼마나 미안했겠어? 하루 후면 발인 해" 라고 연락이 왔었습니다. 


서울 삼성 병원 이었는데 장례식장에 가니 저를 괴롭히던 또 다른 친구들이 와 있어서 먼저 떠난 아이에게 

"그래 미워해서 뭐하겠니? 이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고 너는  이 세상에 없는데..다 잊을게 그러니 미안해 말고 편히 가 

힘든 세상 고생 많았어. 아팠다며? 얼마나 고생했겠어? 그러니 거기서는 아프지 마라. 건강하고" 라고 명복을 빌어주고

집으로 돌아갈려는 찰나에 저를 괴롭혔던 현장에 있던  또 다른 아이들이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. 그래서 결국 마주앉게 

되버리고 말았습니다.  


그리고 그 때 왜 저를 보호 해 주지 못했는지? 왜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걸 알면서 같이 할 수 밖에

없었는지? 미안한 생각은 전혀 없었는지? 한 사람의 생과 가정이 무참히  무너질 수 있다는 범죄 라고는 생각 해 보지 않았는지?

장소가 장소인지라 조용히 묻게 되었고 그제서야 자신들이 너무 어렸고 함께 괴롭히지 않으면! 구타하지 않으면 자신들도 

당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 무서웠다고 너무 뒤늦게서야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고 

용서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. 그리고 연락처는 고등학교 엘범 맨 뒷장에 전 학생의 학번 및 반/ 줄 번호/연락처 기재까지

해 놓은 연락처에서 찾았다고 했습니다,  


차마 용서를 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차 목사님의 "용서해" 라는 말씀 때문에 결국 괴롭혔던 아이들 둘 (남자 아이들) 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. 

그리고 그 아이들도 같이 괴롭히지 않으면 자신이 당할 수 있었기에  "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다. " 라는 마음이 들었고 없던 일로 치게 되어버렸습니다. 


용서하고 나니 이 전 보다는 훨씬 편했습니다. 그리고 그 두명과는 현재 연락을 자주 주고 받기도 하는 사이로 

남게 되기 까지 했습니다. 용서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저는 우울증 이라는 병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. 


그래서 그 당시에 힘들었던 기억을 지우려 이 곳 저 곳 교회를 떠돌고 떠돌다가 지금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로 돌아갔고  

교회 내 기관인 북한 선교회에서 탈북자 구출 요원 이자 행정 사무 직원으로 2년 3개월 이라는 시간을 근무하고나서  

지금은 남 선교회 안내실로 자리를 옮겨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. 


이 일 또한 아팠던 기억을 봉사로 바쁘게 움직이며 힘들었던 일을 잊어가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? 이신 것 같습니다.


비록 아프고 고달픈 삶이었지만 라이트 하우스를 만나서 함께 기도하고 함께 예배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 입니다.


그리고 제가 겪어내지 않았으면 자살 하는 아기들 마음을 영영 알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. 제가 그 아픔을 겪고서야

왜 자살을 하려는지? 제가 먼저 시도 해 보니 죽으려고 하는 아기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습니다. 


그리고 차 선교사님이 왜 그리 "용서하라고~~용서하라고"하셨는지 이제서야 뒤늦게 그 설교를 하셨었는지 

뒤늦게서야 하나 하나 체험하고 있고 하나 하나 배워나가고 있습니다.


차 선교사님 감사합니다. 선교사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차 선교사님이 나라와 버림 받았던 저 같은 상처 입은 아이들

그리고 공산화 되 가는 이 나라를 바라보시며 왜 그리 우시며 기도하시는지 이제서야 알아가며 저 또한 잃었던 애통의 눈물을

다시 되찾고 있습니다. 그리고 유투브로 라도  라이트 하우스 KAM 하나님의 나라 군대 선교회를 만나 행복합니다.


그리고 스텝진들 분들도 차 선교사님도 모두들 밤을 새가며 영상을 만들고 찬양을 연습하시고 무대 만드시고 행정 일 하시고 

또 사랑의 Box 까지 준비 작업을 하시고 탈북자 구츨은 물론이요 국내로 쫓겨나시다 시피 들어오셔서 어려운 환경에 

처하신 선교사님과 해외에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핍박당하던 기독인 알리야 구출 사역 비행기까지 수배 하시는 작업들도 

하셨다는데 그 엄청난 일을 감당하시니 저도 북한 선교회에서 있어봤지만 몸이 부서질 것 같았는데.. 존경스럽습니다.


저도 무너졌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으로 살아내보려 애 써보겠습니다. 십자가만 바라보고 다시 아팠던 

기억으로 되돌아가지 않겠습니다. 주님께오서 당하시었던 고난에 비하면.  평양 산정현 교회 古 주기철 목사님 가정과

여수 애양원 (성산) 교회 古 손양원 목사님 가정이 당하셨던 고통에 비하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닌 고통이었네요..


이제  귀하신 주님의 귀중한 보혈이 묻은 십자가 하나 바라보고 앞으로 전진하겠습니다. 또 기울어져 가는. 공산화 되가는

선조들이 . 예수님께서 피흘려 지키신 이 조국 대한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.

  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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